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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평평한 배 (2020)> <얼굴들 (2020)>
2. <기억 공간 (2021)>
3. <숲 (2020)>
4. <197-54 (2018)>와 <육교 (2020)>
5. <수조 (2021)> <분향소 (2021)>
6. <금요일 문화제 (2022)> <행진 시작! (2022)> <기도회 (2022)> <을지로3가 95-4 (2022)>
7. <서울 시청 광장 (2021)>
8. <얼음 언덕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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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펜화로 <평평한 배>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20년 10월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작업을 하지 못하다 우연히 한 사진을 보고 이를 재구성해 <평평한 배>를 그렸습니다.
사진은 코로나 때문에 집회가 금지되어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버린 광화문 광장의 보도 사진이었습니다. 많은 한국인에게 그렇듯, 저에게는 광화문이 늘 목소리 그 자체인 공간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근처의 서점과 미술관을 오고 가다 광장에 모여 소리 높여 집회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풍경 자체가 이 국가의 가장 막다른 곳처럼 보이곤 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추모 집회가 한창이던 시기에도, 광장을 보면서 그런 기분을 곱씹곤 했습니다. ‘한 사회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그 사회의 민낯이 보인다’는, 이문영 기자님의 문장을 떠올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항상 몸부림치던 공간이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는 사진을 마주했을 때는 그것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고요하고 처참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한 장면과도 같았습니다. 어떤 추모, 어떤 의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늘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는데, 그리고 어떤 시기의 우리는 분명 누군가와 함께 망각에 저항하자는 약속을 나누곤 했는데, 그 풍경을 마주하니 너무도 속절없이 현재에 덜컥 도착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 불꽃이 누군가의 마음에서는 아직 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 광화문을-광화문과 유사한 형태의 침묵의 공간을- 그리는 한 달여 동안에도, 여전히 텅 빈 사진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얼굴들>과 <육교>를 그리는 동안은 수십 명의 사람을 채워 넣었습니다. 아직 저는 그 장소에 있는 (혹은 있을)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선명하게 마주 보고 그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령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람이 모여 서로 기대어 만드는 풍경은 저에게 침묵을 깨뜨릴 듯한 위안을 주었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일곱 번째 봄입니다.
저는 2021년의 봄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에게 봄은 유난히 활기 없고, 고요하고, 축축하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볕 좋은 날에도 괜히 얇은 겉옷을 하나 더 챙겨야 할 것만 같은 서늘함이 피부에 감돕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신발을 신고 뛰어나가도 아무도 없는 풍경만이 펼쳐지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인지, 이 봄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거대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아직 따스한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그렇기에 이 서늘한 감각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202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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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스로와 서로를 지킬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싶다. 나 자신을 지키고, 타인을 지키고, 죽음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천천히 애도할 수 있는 사회에서. 광화문 공사 기간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된 기억 공간이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꼭 찾아낼 수 있기를 기도하며.
(202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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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숲> 연작을 그린 시기는 2020년 12월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는 폭력의 기억으로부터 아주 느리게 회복해가는 시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림 같은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고 몇 년의 시간을 흘려보내다 그해 가을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마음으로 펜을 잡았습니다. 여차여차 삶이 겨울까지 다다랐을 때, 문득 제가 그리워하는 기억 속의 숲과 바다를 지면에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2019년 5월에 일본 시코쿠 현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시코쿠 현에 인접한 세토우치 해의 섬 지역에서 <세토우치 트리엔날레>가 있어서였습니다. 이는 3년에 한 번 열리는 일본의 지역 예술제로, 제가 방문했던 봄 세션은 다카마쓰 항과 이어진 나오시마, 이누지마, 테시마, 오시마, 오기지마 등 섬 지역에서 열렸습니다. 세토우치 해상의 섬들은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오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섬들은 20세기에 제련소 등 산업화 시설로 인해 심각한 환경 오염을 겪었고, 인구가 줄어들어 오랫동안 폐허의 공간으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운영된 것이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와 같은 지역 예술제와 미술관 사업입니다.
세토우치 해상의 섬들은 아주 작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마주하듯 그 모습이 각각 달랐습니다. 테시마에는 주민들의 힘으로 산업 폐기물 불법 투기에 대항해 몇십 년에 걸쳐 자연을 회복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산업 폐기물 규제 정책을 전반적으로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테시마는 그 어느 섬보다도 아름다운 초록빛 풍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시마는 본래 한센병(한국어로 나병 또는 문둥병으로 불리는 병) 환자들을 육지로부터 강제 격리하고 탄압하기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이 국립 요양소로 재개편되고 한센병 환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제정된 이후에야 이 섬에서 존재했던 탄압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시마에는 이전에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하던 숙소동이 그대로 남아 있고, 빼곡한 숲이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는 한센병 탄압의 희생자를 위한 추모 공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누지마는 섬을 한 바퀴 돌려면 세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작은 섬입니다. 섬 전체의 3분의 1은 폐허가 된 거대한 제련소 터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제련소가 운영되던 시기에는 초등학교가 개교할 정도로 섬에 많은 인구가 몰려들었습니다. 이후 몇십 년에 걸쳐 오염이 심해지고 채석업이 쇠퇴하며 제련소가 문을 닫음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섬을 떠났습니다. 한때 3000여 명이 살았던 이누지마에는 현재 50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세토우치 해상의 섬 지역에는 처참한 역사의 흔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 흔적들의 풍경은 저에게 서글픈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곳에는 섬 곳곳에 솟아 있는 제련소의 거대한 굴뚝과 그 아래에서 파도 같이 흔들리던 숲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석탄의 회색을 머금은 바다가 있었습니다. 사람 한 명 높이로 돌을 높게 올려 쌓은 추모의 탑과 그 근처에서 흔들리던 꽃들이, 새파란 잔디밭과 올리브가 가득 열린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섬의 봄에는 여름만큼 뜨거운 햇살이 비쳤습니다. 이 섬에 머물렀던, 혹은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디서라도 길 위에 드리울 것만 같았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에 방문했던 오기지마에서는 예술제를 맞이해 커다란 하늘색 벽화가 새로 그려진 학교 외벽을 보았습니다. 벽화 아래에서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2014년, 예술제를 계기로 오기지마로 돌아오는 주민들의 수가 늘어났고, 휴교 상태였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다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세토우치 해를 ‘희망의 바다로 만들고자 한다’는 예술제의 서문처럼, 그 풍경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빛으로 가득 차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희망의 바다를 마음속에 품고 더 나아가보고 싶습니다.
(202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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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은 제가 2018년 3월에 학보사 기자로 일하던 당시, 학교에서 가까운 동네에서 강제 철거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하게 된 장소였습니다. 취재를 시작했을 때 장위 7구역은 강제 철거가 반 이상 진행되어 있던 상태였고, 그중 가장 마지막까지 7구역에 남아있던 가구가 장위동 197-54번지였습니다.
장위동에 대해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당시에 일어났던 강제 철거의 폭력적인 방식들을, 그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하면 안 되는 행위들을 현장에서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2018년 3월의 장위동은 이미 재개발 조합이 철거민과 대화를 하거나 합의를 하는 단계가 지나 있었습니다. 조합은 단 한 개의 가구를 두고 수백 명의 용역을 고용해서, 안에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포크레인으로 건물을 부쉈습니다. 철거민과 연대자가 기대어 있는 문과 창문들 위로 빠루를 들고 내리치는가 하면, 집으로 향하는 통행로를 가로막고 이를 뚫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밀치거나 때리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사고를 우려해 집행이 법적으로 중단된 동절기에도 이를 어기고 몇 차례나 강제집행을 시도했습니다. 장위동에 거주하는 인구는 연령대가 높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필연적으로 진압 과정에서 부상자가 연이어 나왔고, 장위동의 다른 구역에서는 자살 사망자가 나왔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용역과 폭력을 동원하고 집행 예고를 내리지 않은 채로 들이닥치는 강제 철거의 방식은 그 자체로 불법이기도 하지만, 경찰, 구청 등 공권력이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풍경도 보아야 했습니다. 이 동네는 어차피 철거되어야 할 곳이니 빠를수록 좋다고 모두가 무관심하게 있는 분위기 속에서, 통제를 해야 되는 경찰들이 와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대기하며 방관하고 있는 장면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분명 존재하는 폭력인데,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현장에서는 늘 수백 장의 종이들이 흩날리며 발에 챘습니다. 폭력에 대항하여 맞서는 사람들이 뿌린 종이에는 투쟁을 하다 다치거나 자해를 해서 넝마가 된 몸의 사진들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상처를 보여주어야 이해할 수 있겠냐며 소리 없이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육교>의 배경은 노량진역 2번 출구 계단과 이어져 있는 육교로, 구 노량진 수산시장의 상인들이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시장 현대화 사업이 시작되면서 구 시장이 철거되고 상인들은 신시장 건물로 이주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신 시장의 살인적인 임대료 때문에 현재 육교에 남아있는 상인들은 이주를 거부하며 수협에 투쟁하고 있습니다.
2020년 10월 29일, 이곳의 현대화사업 공사를 두고 투쟁이 일어나던 중, 수협 측 용역이 고압 살수기를 사용해 고령의 상인들을 진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미 추운 날씨였고, 이곳의 노동자들은 연령대가 높은 분들이 대부분인데, 그들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상인들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상인들의 얼굴 바로 앞에서 높은 수압의 물대포를 쏜 것입니다. 그 몇 시간 동안 육교 아래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들은 사고에 대한 어떠한 진압도, 채증도 하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보도를 보며, 2018년 장위동의 풍경이 이곳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육교를 방문하게 된 것은 진압이 있고 나서 얼마 후 후원 주점이 열렸을 때였습니다. 수산시장 노동자들이 행사를 열고 육교 위에다 주점을 만들어 그 수익으로 투쟁을 후원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 상황을 이겨내자는 의지를 다지는 그 풍경을 보니 이 곳을 마냥 텅 빈 폐허의 이미지로만 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림에 사람을 채워 넣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풍경과 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떤 땅에서 벌어진 폭력이 그 땅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땅에서도 반복되고, 이 시간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폭력이 또 다른 시간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용산 참사가 있었고, 장위동이 있었고, 노량진 수산시장이 있었고, 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항상 투쟁하고 있었고, 국가가 그에 대응하는 방식은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2018년의 어느 날, 몇 달에 걸쳐 장위 7구역이 모두 허물리고 197-54번지마저 마지막으로 철거되고 나서, 길과 집들이 전부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인 공터만이 남았을 때, 저의 그림도 잔해만 남은 빈 이미지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빈 공간을 그리며, 이 빈 공간에 끝내 무엇이 남았는지, 이곳이 또 다른 것으로 채워지기 전에 우리가 보존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바라보려 했습니다.
처참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빈 땅을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시간은 또 어떻게 하면 채워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고 앞으로도 내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저 명확하지 않은 마음으로라도 계속 서 있으려 합니다.
(202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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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량진수산시장 상인 故 나세균 열사를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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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2년 동안 을지오비베어가 있던 자리에는 외벽과 내부에 만선호프를 상징하는 색의 페인트가 칠해졌고, 오늘부터는 만선이 그 앞에까지 야장을 깔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강제집행이 완료된 4월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조금씩 파괴되다 어느 날 덜컥 모습을 바꾸곤 하는 오비를 보면, 단순 가게 하나뿐만이 아닌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훼손되어가는 걸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오비와 함께 훼손되어가는 것은 오래된 가게들이 상생하며 만들어 온 노가리 골목의 상권, 노동자들과 세입자들의 자리, 우리가 정의라고 일컫는 것들, 삶을 유지하는 각자의 소소하고 소중한 방식들, 또 무엇이 있을까. 지금 이 시간에 오비베어와 함께 사라져가는 것은 정말 6평짜리 가게 하나 뿐일까.
새로 칠해진 외벽에는 반복해서 새로운 포스트잇이 붙여진다. 투박하게 만들어 전해드렸던 나무 간판도, 맥주가 그려진 커다란 천막도 매일같이 세워진다. 행진을 하다 보면 만선에 앉아 있던 아저씨들이 “나쁜 놈들이었네 여기, 다신 안 와야겠구먼” 하고 혀를 쯧쯧 차는 것을 듣기도 한다. 오비 기도회에 참석할 때면, 내가 몰랐던 종교의 평화로움에 기대게 된다. 마음에 신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는 존재들을 충만한 사랑으로 쓰다듬고 노래하고 기도한다. 자주 방문하지는 못하지만, 오비에 머무는 시간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시간이다. 부디 이 외침이 흔들리지 않고 계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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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계속해서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 피부로 둘러싸인 개체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피부를 뚫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결코 타인의 세계를 지울 수 없습니다.
故 변희수 하사를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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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살아남아버린 우리는 연속성을 가지고 영원히 연대할 거에요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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